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반란 고변 === [[인조반정|반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서인]] 정권은 [[남인]]세력들을 정치에 참여하게 하면서 [[북인]]에게 대해서는 특히 북인 정권 시절에서 권신이었거나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은 재기하게 되면 반드시 서인 권력에 견제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바로 즉시 처벌했다. 이때 [[이이첨]]과 [[정인홍]] 류희분이 목숨을 잃었고 [[박승종]]은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으며[*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조의 처벌 의지가 강했기에 만약 자살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형 당했을 확률이 높다.] 폐모론에 반대했던 [[유몽인]]이 인조정권에 출사하기를 거부 했다는 이유만으로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아들 유약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러한 북인들의 기혹한 처벌은 오히려 반발을 사서, 정국 불안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회[* 문회라는 인물은 이괄의 난이 진압된 후 3등공신으로 임명되나 그후에도 명망있는 사람들을 역모로 무고했다가 무고가 밝혀져 끝내 유배형을 당했으며 형이 끝난 후 사대부사이에서도 경멸당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추측하거나 인조반정 직후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출세하고자 했던 기회주의자로 보인다.], 이우, 권진 등이 "이괄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전 교수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佑), 전 첨사 권진(權聄), 전 참봉 정방열(鄭邦說), 충의(忠義) 윤안형(尹安亨), 허통 한흔(韓訢) 등이 대궐에 나아가 상변(上變)하니, 곧 궐내에서 추국하였다. 문회가 공초하기를, > >"(중략) 대장(大將)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괄(李适)이 거의(擧義)한 날 집에 돌아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 하였다. 이때부터 불궤(不軌)의 뜻을 품고서 한명련(韓明璉)의 세 부자와 정충신(鄭忠信)과 함께 모의하고, 그 아들 이전(李栴)은 정돈·정찬과 함께 유산(游山)한다는 핑계로 외방을 두루 다니며 일을 같이할 사람을 맺었는데, 안변(安邊)의 수령인 정(丁)씨 성을 가진 사람도 그 일을 알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바로 훈신(勳臣)들에게 밀고하고 왕복한 서찰을 증거로 삼았습니다. (후략) >-----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01017_001|인조 2년 1월 17일 임신 1번째 기사]] 인조는 '이괄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라고 상당히 비호했으며 김류 또한 이괄을 두둔했으나, 이귀는 표독스러울 정도로 이괄을 잡을 것을 역설하며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귀의 행적은 그의 문집인 《묵재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적인 기록이라 신빙성을 의심할 수도 있지만, 실록에서도 이귀가 "당장 이괄을 잡아와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묵재일기의 내용 역시 이귀의 행동부분에 한해서는 상당 부분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변에는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었기 때문에, 인조와 김류가 이괄을 두둔한 것은 정상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이귀의 태도도 납득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군권을 가진 사람이 수도에서 자신을 역적으로 의심한다는 소문을 접하게 된다면 없던 역심도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류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이괄을 건드리지 말거나''', 이귀의 주장처럼 '''이괄을 확실히 죽여야''' 뒤탈이 없었을 것이다. 인조는 이괄이 반란을 일으킬 거란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듯하다.[* 연려실기술 같은 야사에서는 과거 이괄을 평안도로 파견할 때도 마차를 손수 밀어주는 신뢰를 보여줬기도 했다. 다만 실록에는 기록이 없다.] 북쪽에 경험이 뛰어난 다른 서인 계통의 장수들도 있었음에도, 굳이 이괄에게 조선의 주력군 거의 대부분을 맡기기도 했고. 상식적으로 이괄을 의심했다면 그 정도로 막중한 권한을 맡겼을 리가 없다.[* 현실적인 판단도 작용하긴 했다. [[광해군]]이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들의 목을 날린 대숙청부터 시작되었던 피바람이 [[인조반정]]으로 겨우 마무리되는 상황이라서, 이제는 반란을 일으켜봐야 새 정권을 세울 만큼의 정치 파벌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상황에서 반정공신까지 된 인물이 또 반란을 일으키리라고 생각치 못한 것이다. 인조 이전의 조선사에서도 반정공신들이 불온한 말을 건네받는 일이 있었으나(신복의의 옥사) 그뿐이었고 '이과의 옥사'라는 사건이 있긴 했지만 주모자 이과는 원종공신에 불과했다. 그나마 유사한 게 있다면 정난공신 봉석주가 역모죄로 죽은 사례였는데, 이 사람은 연산군 때 복권되었으며 선조 때는 아예 시호까지 받았다. 그러니 인조는 아들을 잡아오라는 명을 내리면 수 차례 신뢰를 보여준 이괄이 자신의 뜻을 알고 순순히 따라와서 해명할 거라 생각했던 걸로 보인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괄의 아들만 체포하여 국문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임진왜란때 비변사가 부원수 신각을 참하려는 결론을 내렸을 때나, 이순신 압송할때 달랑 금부도사만 파견한 데서 알 수 있듯 유교를 꾸준히 보급하고 중앙집권을 굳혀온 조선시대에는 자신이 반군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순순히 압송되는게 일반적이었다. 중앙에서 부임해 나가 있는 무장을 압송하는데 별도로 군사 동원한 케이스가 거의 없다. 하지만 이괄은 몇 안되는 예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